수원 사는 여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. 대뜸 “오빠는 손가락이 부러졌나 전화 한 통 없이 뭘 하고 지내는 거야.”한다. 웃으면서 나는 “무소식이 희소식이지 뭐.”라고 답했다.
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구심점이 되어 형제간에 자주 연락하며 모이기도 했는데 두 분 다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는 집안의 애경사 때나 겨우 만나고 있다. 산업화와 더불어 핵가족화되면서 각기 삶의 터전에서 바쁘게 생활하다 보니 친인척 간이나 동기간에 자주 만나거나 소식을 서로 주고받고 할 시간이나 마음의 여유가 빈곤해지고 말았다. 품 안에 자식이라고 아들, 딸도 같이 생활할 때와는 달리 출가외인이 되었다.
지금은 전화 사정도 좋고 스마트폰을 항상 몸에 지니고 사니 궁금하면 어디서나 전화뿐만 아니라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화상통화까지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는데도 친지들과의 연락이 뜸하게 되었다. 말 그대로 이심전심(以心傳心), 무소식이 희소식이 되어 버렸다. 그러나 과연 그럴까?
지난날 우체국을 통해 직접 쓴 편지로 안부와 소식을 주고받던 시절이 그립다. 그 시절 손편지는 삶의 이야기가 담긴, 사랑과 정 그 자체였다. 서로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그 기다림과 짜릿한 감정은 먼 지난날 일이지만 지금도 그 여운을 느낀다.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시대가 되면서 우편함에는 편지는 없고 고지서나 청첩장, 광고 선전물이 대부분이다.
언제 어디서나 연락을 잽싸게 물어다 주는 스마트폰은 편리하지만 불편한 점도 많다. 어느 정보회사에서 개인을 상대로 한 달간 전화를 서로 주고받은 내용을 조사 분석한 바에 의하면 통화의 내용이 꼭 필요한 연락이나 기쁨을 주는 내용보다 친척이나 친구로부터 금전을 좀 빌려 달라든가하는 부탁이나 보이스피싱 등 걱정과 부담을 주는 것들이 더 많다고 한다.
나에게 걸려 온 전화나 문자메시지를 살펴보아도 필요치 않은 게 더 많다. 내가 잘 알고 지내는 친구는 휴대전화를 일과 시간에는 잘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저녁 열시가 넘어서는 전화를 꺼놓는다고 한다.
늙어갈수록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즐겁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고희가 지나니 만날 이들이 점점 준다.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 하나, 둘 세상을 떠나고 몸이 아파 거동을 잘 못하고 병원 신세를 지거나 그나마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친구들도 모임에 나오면 옛날에는 두주불사(斗酒不辭)이던 친구들도 2차 한잔 더하자면 도망가고 만다.
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지만 무소식이 무관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. 노인이 사망하고 보름이 지나도록 방치됐다는 뉴스나 이웃 동네에서 혼자 사시던 할아버지가 딸에게 유서를 써놓고 사망 후 나흘 만에 발견됐다는 소식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. 평소 가깝게 지내는 사이에 한동안 소식 없이 지내다 보면 무소식은 무관심으로 느껴지게 마련이다. 무관심은 개인은 물론 공동체를 메마르고 삭막하게 만들어 또 다른 문제의 씨앗이 될 수 있다.
코로나19로 온 세상이 불안에 떨고 있다.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쟁이다. 변이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린다니 사람들을 만나는 자체가 더 조심스러워진다. 꼭 필요한 일 외에는 외출을 하지 않으니 답답하고 지루하다. 치료제가 곧 나온다고 하니 희망을 걸어본다.
불확실의 시대, 소외되지 않고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나부터 달라져야 한다. 무소식과 무관심은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기도 하다.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들을 겸 가끔 조건 없이 전화 한 통이라도 내가 먼저 걸고 안부를 물어보겠다는 다짐을 해본다. 모처럼 천국에 계신 부모님에게 손편지를 쓰고 싶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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